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콩 경무처 (문단 편집) === [[홍콩일치시기|일제강점기]] === [[1941년]] [[일본군]]의 [[제국주의]]적 침공은 [[중화민국]]을 넘어 홍콩까지 들이닥쳤다. 1차 [[영일동맹]]으로 홍콩의 영국 영유권을 보장한 [[일본]]은 갑자기 이 동맹을 일방 파기하고 [[일본 육군|육군]] 병력과 [[일본 해군|해군]] 육전대로 [[광둥성]]에서 홍콩으로 국경을 넘어 쳐들어갔다. [[영국군]]은 이 기습에 소수의 [[해병대]] 및 [[수병]]을 포함한 [[영국 해군]], 식민지 [[인도 제국]] 용병대나 [[캐나다군]] 및 [[중국인]] 홈 가드로 구성된 역시 1개 사단 급의 소수인 [[육군]]만으로 중요한 식민지인 홍콩을 지키려고 했으나 역부족으로 방어선은 [[일본군 해군]]의 육전대의 [[홍콩섬]] 상륙과 [[일본 육군]]의 국경 돌파로 간단히 뚫려 버렸다. 이때 법관 출신이던 [[홍콩 총독]]은 [[일본군]]의 위세에 겁을 먹고 [[침사추이]] 소재 페닌슐라 호텔에서 [[1941년]] [[12월 24일]] [[크리스마스 이브]] 날 촛불을 켠 방에서 [[영국 해군]] 장교 예복 차림으로 [[일본군]] [[남양군도]] 원정대 총사령관인 [[야마시타 토모유키]] 장군에게 항복해 홍콩은 일본 점령지로 전락했다.[* [[총독]]은 [[문관]]이라도 유사시를 대비해 [[군복]]을 갖추고 있다. 홍콩은 섬이라 해군 군복을 갖고 있었다. [[제2차 세계 대전]] 당시에는 [[영국 왕실]]에서도 군복 차림으로 집무를 보았는데 군 [[통수권자]]가 [[영국 국왕|국왕]]이기 때문이었다.] [[일본군]]의 점령 후 군정 기간 중 당연히 [[포로]]로 잡힌 [[영국군]]과 현지 [[영국인]]과 [[중국인]] 등 홍콩 시민들은 고초를 겪었는데 [[영국인]] 남자들은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여자들은 [[일본군 위안부]]로 끌려갔다. [[중국인]]들은 툭하면 감시나 당하고 2인 이상 못 모여 다니게끔 했으며 [[일본군]]은 [[스타페리]]와 [[홍콩 트램]] 좌석 중 [[백인]]에게만 허락되던 2층에 앉아 위세를 부렸다. [[기독교]] [[교회]]도 전부 폐쇄 조치했는데 기독교 교회들이 저항의식을 선동한다는 이유였다. 당시 [[성공회]] 본부교회 역할을 하는 세인트 존 대성당[* St. John Cathedral로 Cathedral은 대성당 혹은 성전이라는 뜻이며 큰 교회를 캐시드럴(Cathedral), 작은 교회를 Church라고 한다. 영어권에서는 [[가톨릭]], [[개신교]], [[정교회]] 간 [[예배당]]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. 성 요한 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. [[피크트램]] 타는 곳 바로 옆이다.]의 경우 [[일본 육군]] 장교클럽으로 전락했으며 일본군은 절대 손으로, 그것도 비신자가 먹으면 안 되는 [[성체]]를 마구 집어먹는 [[신성모독]]을 저지르기도 했다. 당시 [[영국군]]과 함께 저항세력의 한 축이던 경찰은 해체되어 일본 육군 [[헌병]]들이 이 역할을 대신했고 소방처도 해산되어 [[일본 제국 육군/헌병|육군 헌병대]]가 역할을 대신했으며 일본 육군 헌병대는 [[공포정치]]를 펼쳐 저항을 난폭하게 억눌렀고 이 시기는 홍콩의 [[흑역사]]가 되었다. 그래서 이 짧은 [[일제강점기]] 탓에 홍콩은 [[친일]] 성향이 있는 [[대만]]과 달리 [[반일]] 감정이 은연중에 있다. 어느 정도냐면 문화는 [[일본 문화]]를 좋아하고 [[일본 여행|일본으로 여행]]도 자주 가며 [[일본산]] 브랜드도 흔하지만 막상 역사 문제로 언급되면 날을 세우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을 정도다. 대만과는 달리 [[욱일기]]는 [[일식집]]에서조차 함부로 걸기 힘들다.[* 가끔 보이기는 하는데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사람들, 특히 중장년층이나 노인들이 거칠게 욕하며 당장 치우라고 항의한다.] 홍콩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경찰관들은 패배가 확정되자 철수를 시도했으며 일부는 성공했으나 일부는 철수에 실패했다. 철수하지 못한 경찰관들은 항일 게릴라에 합류해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. 운 좋게 [[영국군]]을 따라 [[호주]]로 후퇴한 경찰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대일 항전을 지원하거나 실제로 [[영국군]] 소속으로 참전하기도 했다. 홍콩의 호국경찰 시기인 셈인데 많은 경찰관들이 이때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포로로 잡혔다.[* 지금도 센트럴의 [[성공회]] 교회인 세인트 존 대성당에 가면 이때 산화한 경찰관들을 추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.] 이렇게 투쟁을 이어가다가 [[1945년]] [[8월 15일]]까지 살아남은 경찰들은 여건이 되자 하나 둘 홍콩으로 복귀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